무제 2016. 12. 27. 15:17

2015.08.05

  이제 나름대로 짬이 좀 차서 선임 행세를 하고 다닌다. 짬찌 시절에 나는 이러이러한 선임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그대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짜잘한 악습을 없앤다든지, 원래 내 보직에서 하는 일인데 예전 사람이 안 하고 막내 시키던 걸 내가 하기로 한다든지, 후임이 힘들어 하는 게 있다 싶으면 얘기를 들어준다든지, 누가 뭘 부탁하면 짬티 안 부리고 해준다든지 하면서 좋은 선임이라는 얘기도 몇 번은 들었다. 후임들이 어려운 얘기도 나한테 스스럼없이 꺼내 놓을 때면 (가끔 귀찮지만) 잘 살았구나 싶기도 하다.
  다만 이러저러한 일들을 한다고 해서 내가 마치 정말 좋은 인간이 된 것마냥 자위하는 건 헛되다는 생각을 한다. 기실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좋은 일들이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라면 당연한 일들이다. 개중에는 사회에서 그렇게 안 했다간 사람 취급 못 받을 일들도 있다. 그러나 짬 찼으면 대접받는다는(짬찌들은 원래 고생한다는) 시스템 덕에, 나는 선임으로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특별히 마음 써서 해준다는 자기위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편 짬찌들(직원-대원 관계에서 대원도 마찬가지다)은 아무리 마음(몸도) 써서 남들 편하라고 일을 해봤자 원래 할 일 한 거라는 무신경함을 얻을 뿐이다. 권력관계의 우위자가 도덕적 우위자가 되기는 참 쉽다는 생각이 든다. 참 불공평한 일이다. 물론 그 쉬운 일도 안 하는 경우가 아주아주 많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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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벼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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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評 2016. 12. 27. 15:15

2015.06.25

최장집 외,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인용
이에 비해 진보적 지식인과 운동가들은 어떤 공동체적 가치와 목적을 상정하고 그로부터 행위의 정당성을 도출해 냈다. 그뿐만 아니라 공익을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그것이 대중의 정치 참여와 민주적 절차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 혹은 이론적 논증을 통해 사전에 결정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했다. "진보는 옳다"는 이들의 주장이 가능했던 것 역시 진보를 현실과는 관계없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주의적·교조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통 시민들이 체제의 중심적 행위자이자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와 그동안 진보적 지식인들이 운동 과정을 통해 발전시켰던 민주주의에 대한 관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며 양자 사이에는 심각한 충돌이 일어난다.(p.148)

posted by 벼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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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評 2016. 12. 27. 15:14

2015.06.23

폴 슈메이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후마니타스, 2010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이야기의 전모와 내재하는 논리를 파악하기에 나의 시야는 항상 좁았고, 그런 한계의 지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의 눈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또 그에 기반해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어떤 절대지(知)에 대한 동경이라기보다, 한 개체로서 고유한 존재방식을 갈구하는 것이다.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본다고 말할 때 나는 동시에 나의 존재를 본다. 그 인식의 결과인 '내가 본 세상'은 곧바로 '타인이 본 세상'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은 소통의 시작이다. 존재방식은 곧 소통방식이 된다. 작가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The more one is conscious of one's political bias, the more chance one has of acting politically without sacrificing one's aesthetic and intellectual integrity.
자기 자신의 정치적 편향을 인식할수록 스스로의 미적·지적 완결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책은 내가 특히 정치 분야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시야를 넓히고, 그 가운데 내가 어디 즈음에 서 있는지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고른 책이다. 19세기의 자유주의·보수주의에서 현대의 자유주의·보수주의에 이르는 당대의 주류 사상들과 더불어 그 사이의 이념들인 아나키즘, 맑시즘, 공산주의, 파시즘·나치즘, 그리고 현대의 새로운 이념분파들인 급진적 그리고 극단적 우파와 좌파에 이르기까지 12가지의 정치 이념을 이 책은 망라한다. 서술 방식 면에서는 이들 이념을 평면적으로 나열하기보다 각 이념들을 4가지의 철학적 가정과 7가지의 정치적 원리라는 기준에 따라 분석해 입체적으로 다룸으로써 하나의 정치사상 지형도를 그려낸다. 
  각 이념의 전제와 주장에 대한 이 책의 분석은 단순히 각 이념의 편향을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항목별 분석에 따라 각 이념의 비교와 유형화가 가능해지고, 이는 사상의 지형도 위에 놓여진 도로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이념들이 각각의 질문들에 대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지점들이 모아지고, 이를 이 책은 다원적 공공 정치철학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철학적 가정 중 하나인 존재론적 관점에서, 우리는 지난 세기들의 경험을 통해 국가, 인종, 종교, 혹은 특정 방향으로의 역사적 진보 등의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는 정치 이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았기에 다른 어던 이념적 가치보다 인간의 삶, 인간의 가능성을 앞에 두는 유연한 존재론에 기본적으로 합의한다. 이 때 유연한 존재론이 다원적 공공 정치철학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형성되는 다원주의 정치이념은 잠정적이다. 생태주의 이념은 인간이 피할 수 없이 속해 있는 자연이라는 실재를 현대의 주류 정치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현재의 다원주의 정치는 생태 윤리적 존재론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다원적 공공 정치철학은 이념들 간의 끊임없는 소통의 결과이다. 
  위와 같은 일반적 차원의 다원적 공공 정치철학은 실제 정치 공동체의 정치적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하기 위해 보다 구체적인 정치이념으로서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정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는 이 작업은 특히 보수주의 헤게모니에 맞서 새로운 판을 구성해야 할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지난 몇 년간 보수 정권에 쏟아졌던 비난은 보수주의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소통의 부재, 책임성 결여와 같은 다원주의의 부재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다원주의-반(反)다원주의라는 갈등축이 두드러진다는 사실 자체가 실제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갈등축이 배제된 채 중산층과 정치엘리트들의 무대가 된 한국 정치의 문제를 방증한다. 단순히 타협에 기반해 다원주의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의 편향성을 다원주의의 틀 안에 녹여내는 것이 진보주의의 과제이다.

posted by 벼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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