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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12 :: 인용과 감상 - 김진석, 《왜 니체는 민주주의를 반대하는가》, 개마고원, 2009
평評
2014. 2. 12. 20:37
194쪽
니체는 심오하고 고귀한 문화는 언제나 여러 방식으로 잔인함을 내포한다고 했다. 비록 그것의 직접적인 표현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폭력성과 잔인함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정신화하고 내면화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텍스트에 내재하는 폭발력의 큰 몫이 여기 있다. 아무리 원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 문화의 진행과정 속에서 사라지거나 극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폭력적인 것이 순전히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문화와 폭력은 안팎의 관계에 있다. 서로 분리되지 않는 안팎의 관계. 그러므로 폭력이나 잔인함이 문화에 내재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나쁜 것도 아니고 결함도 아닐 것이며, 그것이 어떤 행위나 목적에 봉사하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해석될 여지가 적지 않다. 따라서 모든 폭력이나 잔인함을 몰아내고 배제하려는 시도야말로 맹목적일 뿐 아니라 공허할 수 있다.
263-264쪽
여기서 우리는 모든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근본주의의 문제와 직면한다. 자신이 유일하고 보편적인 해결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회적 갈등 해결방식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다시 폭력적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폭력 시스템 안에서 개인들이나 집단들을 때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때로는 많건 적건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단순히 도덕적 원칙에 근거해 비난한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자신은 모르거나 부인하지만, 폭력적이다. 순수하게 깨끗한 도덕적 원칙이나 우월성에 근거하기에 자신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는 이 부인(否認)은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폭력을 내면화했다. 그와 달리 실존적 상황에서 개인들이나 집단이, 특히 상대적으로 약한 쪽의 개인이나 집단들이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냉정하게 혹은 반성하면서 분석하는 담론은 폭력을 그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조건 배제해야 할 ‘악’으로 보지는 않는다.
니체의 관점에 기반한 김진석의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우파와 좌파 모두 유념해야 한다. 이를테면 국가는 사회적으로 합의되었다고 인정된 규범인 법을 토대로 영역 내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법 역시 그 제정, 법리판단, 집행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제와 폭력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법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믿을만한 원칙일지언정 ‘순수하게 깨끗한 도덕적 원칙이나 우월성’이 될 수는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시민불복종’이라는 수단을 통해 유일하게 합법적인 폭력의 담지자인 국가를 민중의 이름으로 견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랑스러운 불통’이라는 표현으로 대별되는, 약자의 불법행위에 대한 ‘원칙적 대응’의 정당성은 재고되어야 한다. 비록 폭력(불법행위) 자체가 정당화될 수는 없을지 모르나, 폭력이 어떤 정치적 행위를 위한 유일한 수단일 때 폭력은 그 갈등의 양태와 현재 법체계의 폭력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이 때 폭력은 절대악이 아니다. 그렇기에 불법행위에 대한 ‘자랑스러운 불통’과 같은 선언은 법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율사적 판단보다는 훨씬 복잡한 판단에 근거해야 하며, 이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한편으로
교육현장에서 폭력적 요소들이나 야만적 요소들을 전부 추방하고 전인교육을 추구해야 한다는 도덕주의적 근본주의. 민족중심적 움직임이나 열정은 노동계급의 보편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모두 해체되어야 한다는 민족초월적 근본주의. 모든 생명은 고귀한 것이기에 어떤 생명의 씨앗에도 해를 입힐 수 없다고 말하면서, 정작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성적 차별이나 민족과 종족 사이의 싸움에서는 눈을 돌리는 생명근본주의. 국가주의적 폭력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씨앗이 있다면 아주 근절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파시즘에 빠질 것이라는 ‘일상적 파시즘’류의 근본주의. 모든 갈등과 전쟁은 나쁜 것이기에 근본적인 반전주의와 평화주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근본주의. 또 소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타락시키기에, ‘존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존재근본주의. 부드럽고 여성적인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할 때 그것이 일종의 실천적 전략임을 부인하면서, 무조건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보편성으로 여기려는 노자식 근본주의 등.(264쪽)
은 같은 논리로 비판받을 수 있는 좌파 근본주의 이론의 예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반폭력을 외치면서도 그 내부에 이미 폭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모순에 빠지거나,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를 향한 어떤 대안도 스스로에 의해 거부되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원래 이 책,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를 읽었던 건 니체에 대한 변호 내지는 새로운 해석을 듣고 싶었기보단 민주주의에 대한 변호 내지는 그 발전 방향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1부와 2부는 상대적으로 니체의 반민주성에 대한 비판을 니체를 섬세하게 해석함으로써 방어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설명되는 ‘강자의 덕’ 이라든지, ‘위대한 정치’라든지, ‘격차의 열정’이라든지 하는 니체의 철학적 개념과, 해체론이라든지, 노마디즘이라든지 하는 니체로부터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등을 배경지식 없이 따라가기가 조금 어려웠었다. 한편 2부 중반부터 시작되는 책의 후반부는 1부와, 2부 초반에서 정리된 니체의 정치철학에 대한 관점을 통해 페미니즘, 미시 파시즘론과 더불어 최종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바라본다. 조금 정리해 보면 이렇다. 니체는 민주주의의 이상인 ‘만인의 평등한 권리’가 실현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조차 않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만민의 평등한 권리는 겨우 기회의 평등 정도로 실현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의 평등은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불평등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지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권력에의 의지로 연결되며, 이는 다른 개체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고, 강함을 확보하려는 격차의 열정으로 발전하는데, 이 과정에서 불평등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등한’ 권리는 실현불가능하다. 그리고 니체는 이를 넘어서 존재하고 있는 불평등을 드러내고 격차를 권장하는 것이 인류사회의 문화적 성취에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약자의 희생은 필연적인 것이며, 긍정된다. 여기에서 지배자로부터 자신들의 동등한 ‘권리’를 얻어내려는 민중들의 시도는 수동적인 약자의 논리에 따른 것이며, 그러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니체의 이러한 비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먼저 민주주의 시대에 우리가 추구하려 하는 가치는 약자를 포함한 모두의 권리의 보장이다. 그리고 모두의 권리보장은 단순히 (니체가 해체하려는) 도덕적 차원에서만 정당화되지 않는다. 책은 니체 자신 역시 민주주의가 기반을 두고 있는 약자의 원한이 강자의 덕과는 또 다른 창조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강자만큼이나 약자 역시 생명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약자의 권력의지로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약자들의 권력의지에 의해 형성된 체제이며, 약자들의 권력의지를 보장하려는 체제이다. 이는 그 자체로 강자의 덕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낸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이를테면 사회적 정의와 같은 가치는 강자의 지배논리와는 별개로 약자들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가치이다. ‘신은 죽었’다는 파격적인 선언 뒤에 니체는 다시 강자와 약자라는, 전통의 위계질서로 회귀할 위험이 있는 구별을 내놓았으나, 그 붕괴 뒤에는 강자의 화려한 복귀가 아니라 약자의 끈덕진 부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스스로 평등과 자유를 지향하는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문화가 정착되기까지, 특히 자본주의와 결합된 경제 영역에서 수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국가적 폭력이, 시공간적 불균형 속에서 자행되어 왔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국가 차원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 비민주적 폭력을 자행했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이 민주주의를 성립하는 데 필요했던, 적어도 경제적 동력은 상당부분 19세기의 식민지배와, 세계대전에의 참전과 승리에 기인한다. 그리고 현대의 미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들이 국내정치에서와 국제정치에서 판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의 희생을 강요한 끝에 민주주의 성립의 요소인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한국의 사례에서 대표적으로 보듯이, 국내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는 폭력 위에 서 있었다. 이러한 폭력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니체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민주주의의 가치는 완전히 부정된다. 그러나 좌파가 민주주의를 추동한 수단조차 폭력이었기에 폭력을 완전히 뿌리 뽑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좌파에게 있어서도 자기부정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가치를 중심에 둔 균형이다. 사회적 정의라는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는 어느 정도의 폭력을 용인할 것인가? 예를 들어,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경쟁체제가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성장을 계속할 정도의 인력을 재생산해 낸다고 합의할 것인가? 여기서부터는 정치의 영역이다.
니체는 심오하고 고귀한 문화는 언제나 여러 방식으로 잔인함을 내포한다고 했다. 비록 그것의 직접적인 표현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폭력성과 잔인함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정신화하고 내면화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텍스트에 내재하는 폭발력의 큰 몫이 여기 있다. 아무리 원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 문화의 진행과정 속에서 사라지거나 극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폭력적인 것이 순전히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문화와 폭력은 안팎의 관계에 있다. 서로 분리되지 않는 안팎의 관계. 그러므로 폭력이나 잔인함이 문화에 내재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나쁜 것도 아니고 결함도 아닐 것이며, 그것이 어떤 행위나 목적에 봉사하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해석될 여지가 적지 않다. 따라서 모든 폭력이나 잔인함을 몰아내고 배제하려는 시도야말로 맹목적일 뿐 아니라 공허할 수 있다.
263-264쪽
여기서 우리는 모든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근본주의의 문제와 직면한다. 자신이 유일하고 보편적인 해결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회적 갈등 해결방식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다시 폭력적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폭력 시스템 안에서 개인들이나 집단들을 때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때로는 많건 적건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단순히 도덕적 원칙에 근거해 비난한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자신은 모르거나 부인하지만, 폭력적이다. 순수하게 깨끗한 도덕적 원칙이나 우월성에 근거하기에 자신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는 이 부인(否認)은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폭력을 내면화했다. 그와 달리 실존적 상황에서 개인들이나 집단이, 특히 상대적으로 약한 쪽의 개인이나 집단들이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냉정하게 혹은 반성하면서 분석하는 담론은 폭력을 그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조건 배제해야 할 ‘악’으로 보지는 않는다.
니체의 관점에 기반한 김진석의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우파와 좌파 모두 유념해야 한다. 이를테면 국가는 사회적으로 합의되었다고 인정된 규범인 법을 토대로 영역 내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법 역시 그 제정, 법리판단, 집행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제와 폭력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법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믿을만한 원칙일지언정 ‘순수하게 깨끗한 도덕적 원칙이나 우월성’이 될 수는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시민불복종’이라는 수단을 통해 유일하게 합법적인 폭력의 담지자인 국가를 민중의 이름으로 견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랑스러운 불통’이라는 표현으로 대별되는, 약자의 불법행위에 대한 ‘원칙적 대응’의 정당성은 재고되어야 한다. 비록 폭력(불법행위) 자체가 정당화될 수는 없을지 모르나, 폭력이 어떤 정치적 행위를 위한 유일한 수단일 때 폭력은 그 갈등의 양태와 현재 법체계의 폭력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이 때 폭력은 절대악이 아니다. 그렇기에 불법행위에 대한 ‘자랑스러운 불통’과 같은 선언은 법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율사적 판단보다는 훨씬 복잡한 판단에 근거해야 하며, 이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한편으로
교육현장에서 폭력적 요소들이나 야만적 요소들을 전부 추방하고 전인교육을 추구해야 한다는 도덕주의적 근본주의. 민족중심적 움직임이나 열정은 노동계급의 보편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모두 해체되어야 한다는 민족초월적 근본주의. 모든 생명은 고귀한 것이기에 어떤 생명의 씨앗에도 해를 입힐 수 없다고 말하면서, 정작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성적 차별이나 민족과 종족 사이의 싸움에서는 눈을 돌리는 생명근본주의. 국가주의적 폭력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씨앗이 있다면 아주 근절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파시즘에 빠질 것이라는 ‘일상적 파시즘’류의 근본주의. 모든 갈등과 전쟁은 나쁜 것이기에 근본적인 반전주의와 평화주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근본주의. 또 소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타락시키기에, ‘존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존재근본주의. 부드럽고 여성적인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할 때 그것이 일종의 실천적 전략임을 부인하면서, 무조건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보편성으로 여기려는 노자식 근본주의 등.(264쪽)
은 같은 논리로 비판받을 수 있는 좌파 근본주의 이론의 예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반폭력을 외치면서도 그 내부에 이미 폭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모순에 빠지거나,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를 향한 어떤 대안도 스스로에 의해 거부되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원래 이 책,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를 읽었던 건 니체에 대한 변호 내지는 새로운 해석을 듣고 싶었기보단 민주주의에 대한 변호 내지는 그 발전 방향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1부와 2부는 상대적으로 니체의 반민주성에 대한 비판을 니체를 섬세하게 해석함으로써 방어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설명되는 ‘강자의 덕’ 이라든지, ‘위대한 정치’라든지, ‘격차의 열정’이라든지 하는 니체의 철학적 개념과, 해체론이라든지, 노마디즘이라든지 하는 니체로부터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등을 배경지식 없이 따라가기가 조금 어려웠었다. 한편 2부 중반부터 시작되는 책의 후반부는 1부와, 2부 초반에서 정리된 니체의 정치철학에 대한 관점을 통해 페미니즘, 미시 파시즘론과 더불어 최종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바라본다. 조금 정리해 보면 이렇다. 니체는 민주주의의 이상인 ‘만인의 평등한 권리’가 실현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조차 않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만민의 평등한 권리는 겨우 기회의 평등 정도로 실현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의 평등은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불평등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지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권력에의 의지로 연결되며, 이는 다른 개체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고, 강함을 확보하려는 격차의 열정으로 발전하는데, 이 과정에서 불평등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등한’ 권리는 실현불가능하다. 그리고 니체는 이를 넘어서 존재하고 있는 불평등을 드러내고 격차를 권장하는 것이 인류사회의 문화적 성취에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약자의 희생은 필연적인 것이며, 긍정된다. 여기에서 지배자로부터 자신들의 동등한 ‘권리’를 얻어내려는 민중들의 시도는 수동적인 약자의 논리에 따른 것이며, 그러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니체의 이러한 비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먼저 민주주의 시대에 우리가 추구하려 하는 가치는 약자를 포함한 모두의 권리의 보장이다. 그리고 모두의 권리보장은 단순히 (니체가 해체하려는) 도덕적 차원에서만 정당화되지 않는다. 책은 니체 자신 역시 민주주의가 기반을 두고 있는 약자의 원한이 강자의 덕과는 또 다른 창조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강자만큼이나 약자 역시 생명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약자의 권력의지로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약자들의 권력의지에 의해 형성된 체제이며, 약자들의 권력의지를 보장하려는 체제이다. 이는 그 자체로 강자의 덕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낸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이를테면 사회적 정의와 같은 가치는 강자의 지배논리와는 별개로 약자들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가치이다. ‘신은 죽었’다는 파격적인 선언 뒤에 니체는 다시 강자와 약자라는, 전통의 위계질서로 회귀할 위험이 있는 구별을 내놓았으나, 그 붕괴 뒤에는 강자의 화려한 복귀가 아니라 약자의 끈덕진 부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스스로 평등과 자유를 지향하는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문화가 정착되기까지, 특히 자본주의와 결합된 경제 영역에서 수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국가적 폭력이, 시공간적 불균형 속에서 자행되어 왔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국가 차원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 비민주적 폭력을 자행했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이 민주주의를 성립하는 데 필요했던, 적어도 경제적 동력은 상당부분 19세기의 식민지배와, 세계대전에의 참전과 승리에 기인한다. 그리고 현대의 미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들이 국내정치에서와 국제정치에서 판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의 희생을 강요한 끝에 민주주의 성립의 요소인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한국의 사례에서 대표적으로 보듯이, 국내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는 폭력 위에 서 있었다. 이러한 폭력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니체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민주주의의 가치는 완전히 부정된다. 그러나 좌파가 민주주의를 추동한 수단조차 폭력이었기에 폭력을 완전히 뿌리 뽑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좌파에게 있어서도 자기부정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가치를 중심에 둔 균형이다. 사회적 정의라는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는 어느 정도의 폭력을 용인할 것인가? 예를 들어,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경쟁체제가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성장을 계속할 정도의 인력을 재생산해 낸다고 합의할 것인가? 여기서부터는 정치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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