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3
예술적인 삶을 살고 싶다.
이것은 모든 이미지화된 삶들에 대한 반대다. 한편으로는 아직 남아있는, 내가 스스로 이름붙일 수 있는 삶에 대한 예의다.
예술적인 삶은 예술하는 삶과 조금 겹치지만 아주 다르다. 예술하는 삶은 이미 위기에 빠졌다. 릴케는 이렇게 말했다.
비현실적이거나 반半예술적인 직업들보다는 차라리 현실적인 직업을 갖고서 우리는 예술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반半예술적인 직업들은 예술을 애호하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든 예술의 존재를 부정하고 공격합니다. 저널리즘 전체가 바로 그러한 행위를 합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비평이 그렇고 또 문학의 이름으로 불리고 또 불리고자 하는 것의 4분의 3이 그렇습니다.
비현실적이거나 반예술적인 직업들은 얼핏 예술하는 삶이지만, 그것들(중 대부분)은 사실 '그것 자체'인 예술에 '의미'를 덧씌움으로써 예술을 이미지화한다. 이미지화된 예술은 이제 소비되기 위한 상품으로 전락한다. (굳이 '전락'한다고 쓴 것은 예술이 뭐 특히나 고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이 동일한 가치척도로 재단되는 시장에서는 모든 상품들이 '전락'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술로부터 예술의 존재기반인 현실을, 삶을 유리시키고, 예술하는 삶은 그때부터 위기에 빠진다. 단순히 예술을 소비하기만 하는 삶은 우리의 순수에 도움은 되지 않을지언정 해가 될 것은 없으나, 어설프게 예술하는 삶은 치명적이다. 나는 예술을 위기에 빠트리는 예술하는 삶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예술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예술하는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다.
대안은 예술적인 삶이다. 예술적인 삶은,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삶이다. 예술적인 삶이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릴케가 '현실적인 직업을 갖고서 우리는 예술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예술적인 삶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자기계발서를 읽거나 쓰기보다, 묵묵히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다. 먹방을 찍거나 보기보다, 그 음식을 먹는 것이다. 야동을 찍거나 보기보다, 그걸 하는 것이다!(+ 우결 따위를 찍거나 보기보다 결혼을 한 번 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이미지들로 포르노그래피화된 우리의 '삶'을 되찾기 위한 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