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선거'에 해당되는 글 1건
- 2018.09.23 :: <1996년 종로, 노무현과 이명박>, 양원보
이후의 정치판을 규정하는 중요한 선거를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라 부른다. 이를테면 김영삼이 당선됐던 1992년의 대선이 그렇다.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1990년의 3당합당으로 한국 정치의 구도는 호남 대 반호남으로 짜였다. 인구구조상 웬만해선 영남과 충청 연합이 호남을 눌렀고, 호남은 수도권의 표를 거의 가져와야 신승할 수 있었다. 그 구도를 확인한 1992년 대선 이래, 대부분의 선거가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사실 90년대 전체가 한국정치에는 '정초'의 시기였다. 1987년의 민주화로 촉발된 유동성은 1990년의 3당합당에 의해 지역주의로 굳어졌다. 1997년의 첫 정권교체도 어디로 튈지 모를 사건이었는데, 1998년 IMF 사태로 인해 경제적 자유주의 쪽으로 머리를 틀었다.
90년대는 우리가 민주화 이후의 두 문제와 마주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먹고사니즘'이다. 형식적 민주화를 이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국민의 의사를 따르게 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민주정부는 결국 어떻게 국민을 잘먹고 잘살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부딪힌다. 좋은 정치와 경제 성장, 두 가치는 때로 선순환하지만 때로 충돌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1996년 총선이 있었다.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만난 노무현과 이명박. 그 선거는 민주화 뒤의 두 문제의 대결이자, 또 하나의 정초선거였다. 어떤 면에서는 예언적이었다. 개발논리를 앞세웠던 이명박은 선거에서 이겼지만 선거자금이 문제가 돼 의원직을 잃었다. 노무현은 선거에서 졌지만 종로로 돌아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탄생을 이끌었다. 그 이후 둘은 차례로 대통령이 됐다. 지금 대통령은 문재인의 친구고, 이명박은 구치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다.
노무현과 이명박이 보여준 두 가치의 긴장은 오늘도 여전하다. 이번 정부는 새로운 소통방식을 보여줬고, 외교 분야 성과를 내고 있지만 악화되는 경제지표라는 틈을 내주고 있다. 새로운 이명박이 등장할지 모른다. 좋은 정치와 경제 성장은 정말 같기 가기 어려운 걸까?
노무현은 개표 때면 잠을 잤던 모양이다. "13대 선거 때는 개표 도중 자다가 일어나 보니 이미 당선이 돼 있었는데 14대 선거에선 자다가 일어나 보니 이미 엄청난 차이로 벌어져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6년 15대 총선서도 캠프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선거에 질 때마다 정치 그만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단다. 이걸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자의 모습으로 볼지, 국민의 뜻이든 뭐든 '될 대로 되라'는 시니컬한 모습으로 볼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나는 나름의 결론이 있다. 아래에 붙인, 노무현이 1997년 종로 재보선서 이기고 국회로 돌아올 때의 인사말을 읽고 내린 거다.
(전략)...국회의원 선거 두 번 떨어지고 다른 선거도 좀 떨어지는 동안에 모든 것이 제 잘못은 없고 전부 선배 정치인들, 또 전체 정치판의 잘못 때문에 떨어졌는가 싶어 마음속에 원망도 많고, 맺힌 생각도 참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면, 음... 저만 잘나고 정치만 잘못되고, 꼭 그리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가 안고 있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 우리가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여러가지 정치적 상황과 구도가 누구누구 탓할 것 없이, 국민들한테 모두 신용을 잃고 있는 정치적 구조 속에서, 저도 떄로는 좋은 기분도 느끼고, 떄론 어려움도 겪고 했던 것 같습니다. 흠,...
(중략)...그동안 저 혼자 무척 잘난 국회의원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었는데, 실제로 13대 국회 때나 떨어져 나가서 바깥에 있을 때나 일을 해보니까, 몇 가지 지식을 더 가지고 있다든지 몇 가지 논리적인 능력을 더 갖고 있다고 꼭 잘난 정치인은 아니라는 생각, 참 많이도 해봤습니다.
또 동료 의원 여러분들, 모처럼 오랜만에 모난 성격의 정치인이 돌아왔지만 사랑해주시고 또 서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해서, 크게는 나라에 좀 보탬이 되면 좋겠고, 작게는 우리 정치인 모두가 국민들한테 존견받는 정치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평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부겸 당선인 강연. 20대 총선과 한국정치의 변화. 정리와 코멘트 (0) | 2016.12.27 |
---|---|
최장집 외,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인용 (0) | 2016.12.27 |
폴 슈메이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0) | 2016.12.27 |
안드레아 즈비아긴체프, 『리바이어던』, 2014 (0) | 2016.12.27 |
오지은의 노래들 (0) | 2016.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