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8
연애의 고통이란 견뎌 볼 만한 것이 아닐까, 하는 식의 낭만적인 마무리를 하려고 한 것은 사실 아니었고, 그보다는 어차피 고통스러운 것이니 피할 생각을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주어지는 고통을 단지 견디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주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오)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에 쓴 것처럼, '고통은 적응의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이다... 그걸 견뎌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견뎌 볼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운운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단선적인, 기능주의적 설명이다. 실상 우리가 관계 안에서 변화하는 과정은 우리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고통스러운데 노력까지 해야하다니! 고통이 두 배다.
물론 이 사실이 연애라는 관계의 난이도를 두 배로 높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일종의 어드벤처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과 치고 받는 전투보다 주어진 단서와 도구를 모두 동원해 플레이어 앞에 놓인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것이 바로 어드벤처 게임(adventure game)의 핵심이다."라고 네이버캐스트는 쓰고 있는데,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의 어드벤처이다. 다만 단순히 내가 너라는 수수께끼를 푼다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고, 여기서 플레이어는 내가 될 수도, 우리가 될 수도 있고, 수수께끼는 나, 아니면 너, 혹은 우리의 관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수수께끼를 푼다는 것은 노력을 통해 기대와 현실의 차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쩌면 수수께끼를 푼다는 표현은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연애의 과정에서는 기대와 현실이 타협해 합치된다는 결과보다 그 지난한 노력의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 전혀 새로운 어떤 관계가 창조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며다. 이를테면 게임 언더테일에서는 우리가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 끝에 마주치는 진실은 단일한 것이 아니며,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 다시 말해 디테일이 그 게임의 핵심을 이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그 노력의 과정 속에서 너도, 나도, 우리의 관계도, 어떤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현실과 기대 사이의 1차원적 타협이 아니라 변증법적 창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러면 노력도 해볼 만한 것이 아닐까? 여전히 결론이 마음에 걸리지만, 무튼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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