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評 2016. 12. 27. 14:58

2014.01.16 

천장환, 『현대 건축을 바꾼 두 거장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VS 미스 반 데어 로에』
오래 전부터 아파트에는 살지 말아야지,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파트의 획일적인 평면들이 싫다. 내 윗집과 아랫집이 내 집과 똑같은 방과, 똑같은 화장실과, 똑같은 거실과 부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나쁘다. 그래서 그 소망은 내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내 집'. 
주거는 기본적으로 안전한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위험한 외부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이다. 집이라는 공간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없는 곳이며, 그말인즉슨 말 그대로 '내 공간'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나는 내 집 안에서 자유롭다. 나는 내 집 안에서의 자유가 풍요로울수록 좋은데, 아파트의 획일화된 집 구조는 그를 제한한다. 내 삶을 담는 틀은 내가 만들고(최소한 내가 참여해서 만들고) 싶다. 
현대 건축을 바꾼 두 거장은 가장 위대한 근대 건축가 3인으로 꼽히는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어 로에 중 라이트와 미스에 대한 책이다. 라이트의 건축을 훑어보면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의 건축적 유연성과 끊임없는 혁신이다. 초기의 일반적인 퀸 앤 양식의 주택에서 혁신적인 프레리 양식으로, 그리고 그를 다시 넘어서 낙수장(Fallingwater)과 구겐하임 미술관에 이르기까지 라이트는 자신의 건축에 끊임없이 새로운 요소를 받아들였다. 그 자신이 거부하고 심지어는 피해의식을 느끼기까지 했던 국제주의 양식의 요소들마저도 자신의 건축에 차용했다. (그가 거부했던 것은 아마 국제주의 양식의 건축적 요소들이 아니라 그러한 '양식'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추구했던 것은 '유기적 건축' 이었는데, 지금 현재 완공을 앞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DDP에서 추구하는 유기적 건축과 비교할 만하다. 아래는 라이트가 자신이 추구한 '유기적 건축'이 완벽하게 구현된 한 예였던 탤리에신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나는 어떠한 집도 언덕 바로 위에 지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집은 언더게서 살짝 비껴 지어져서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 결국 언덕과 집은 서로 공존해야만 한다.
'유기적'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책은 역사학자 윌리엄 크로넌의 인터뷰를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유기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단순히 자연에서 곧장 얻어진 것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라이트가 말한 '유기적'이나 '자연적'이라는 것과 의미가 같지 않다. 그가 의미한 것은 자연에서 얻은 것들이 예술가들로 하여금 자연의 형태를 넘어선 어떤 이상적인 형태를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뜻이다. 따라서 라이트에게는 예술가의 작업이란 자연 그 자체보다 더욱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상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의 말을 해석하면 '주변 환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 주변 환경을 뛰어넘도록 만든 더욱 자연스러운 건물'이 바로 '유기적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라이트가 추구한 건축은 주변 환경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동일한 환경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그의 건축이 계속적으로 혁신되어야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드러운 곡선의 비정형 구조가 건물 내의 공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잇도록 설계된 자하 하디드의 DPP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유기적'인가? 
라이트의 건축이 상대적으로 '도시'라는 정치 사회적 맥락과는 거리가 멀었던 데 비해, 미스의 건축은 매우 '도시적'이었다. 그는 많은 집합주택과 도심 빌딩들을 설계했다. 미스의 도시적 건축은 그가 추구했던 universal space(일원적 공간, 보편적 공간, 무한정 공간. 책에서는 무한정 공간으로 변역했다)와 맞닿는다. 주거에서는 '화장실과 부엌만이 고정될 것이고 나머지 공간은 칸막이에 의해 사용자가 마음대로 구획할 수 있는 공간'으로 표현될 수 있겠다. 미스의 대표작인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는 철골 기둥에 의해 벽들이 구조체의 역할에서 해방되면서, 내부와 외부 공간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자유로운 평면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이 공간은 외부로 한없이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무한정'하고, 그 자유로운 공간이 무수히 많은 새로운 공간이 될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일원적'이다. 수많은 다양한 삶들이 들어찰 도시공간에 건축가가 모든 집을 개개인의 삶과 주변 환경에 맞추어 유기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그것은 상황 탓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가 타인의 삶, 혹은 주변 환경, 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제 건축가에게 남은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사용자가 채울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책에서는 미스가 추구했던 것이 완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예술이었다고 말하지만, 미스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공간이란 필연적으로 '삶의 공간'이고, 미스가 그의 미국 시절 대표작인 시그램 빌딩을 통해 보여주는 깔끔한 입방체 입면과 구조는 어떤 삶으로든 채워질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에 대한 지향이다. 
미스가 추구했던 공간은 특히 미국에서 시대의 친구가 되었다. 2차대전 이후의 미국은 자본주의라는 체제 아래에서, 기능주의와 합리성을 추구했고, 미스가 추구했던 것이 공간의 예술적 완성이었든 무엇이었든, 미스의 universal space는 자본으로 채워지고 자본에 의해 복제된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보는 고층 빌딩들의 스카이라인! 획일화된 건물과 공간구조들. 미스를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말년의 미스가 지은 비슷비슷한 입면의 건물들은 미스가 추구했던 방향이 너무나 순수했고, 그래서 너무나 취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미스를 필두로 한 국제주의 양식은 로버트 벤추리나 한때 미스의 추종자이자 동료이기도 했던 필립 존슨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 흐름을 넘겨주게 된다.

posted by 벼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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