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評 2018. 9. 23. 22:37

 이후의 정치판을 규정하는 중요한 선거를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라 부른다. 이를테면 김영삼이 당선됐던 1992년의 대선이 그렇다.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1990년의 3당합당으로 한국 정치의 구도는 호남 대 반호남으로 짜였다. 인구구조상 웬만해선 영남과 충청 연합이 호남을 눌렀고, 호남은 수도권의 표를 거의 가져와야 신승할 수 있었다. 그 구도를 확인한 1992년 대선 이래, 대부분의 선거가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사실 90년대 전체가 한국정치에는 '정초'의 시기였다. 1987년의 민주화로 촉발된 유동성은 1990년의 3당합당에 의해 지역주의로 굳어졌다. 1997년의 첫 정권교체도 어디로 튈지 모를 사건이었는데, 1998년 IMF 사태로 인해 경제적 자유주의 쪽으로 머리를 틀었다. 

 90년대는 우리가 민주화 이후의 두 문제와 마주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먹고사니즘'이다. 형식적 민주화를 이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국민의 의사를 따르게 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민주정부는 결국 어떻게 국민을 잘먹고 잘살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부딪힌다. 좋은 정치와 경제 성장, 두 가치는 때로 선순환하지만 때로 충돌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1996년 총선이 있었다.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만난 노무현과 이명박. 그 선거는 민주화 뒤의 두 문제의 대결이자, 또 하나의 정초선거였다. 어떤 면에서는 예언적이었다. 개발논리를 앞세웠던 이명박은 선거에서 이겼지만 선거자금이 문제가 돼 의원직을 잃었다. 노무현은 선거에서 졌지만 종로로 돌아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탄생을 이끌었다. 그 이후 둘은 차례로 대통령이 됐다. 지금 대통령은 문재인의 친구고, 이명박은 구치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다. 

 노무현과 이명박이 보여준 두 가치의 긴장은 오늘도 여전하다. 이번 정부는 새로운 소통방식을 보여줬고, 외교 분야 성과를 내고 있지만 악화되는 경제지표라는 틈을 내주고 있다. 새로운 이명박이 등장할지 모른다. 좋은 정치와 경제 성장은 정말 같기 가기 어려운 걸까?

 노무현은 개표 때면 잠을 잤던 모양이다. "13대 선거 때는 개표 도중 자다가 일어나 보니 이미 당선이 돼 있었는데 14대 선거에선 자다가 일어나 보니 이미 엄청난 차이로 벌어져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6년 15대 총선서도 캠프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선거에 질 때마다 정치 그만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단다. 이걸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자의 모습으로 볼지, 국민의 뜻이든 뭐든 '될 대로 되라'는 시니컬한 모습으로 볼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나는 나름의 결론이 있다. 아래에 붙인, 노무현이 1997년 종로 재보선서 이기고 국회로 돌아올 때의 인사말을 읽고 내린 거다.

 (전략)...국회의원 선거 두 번 떨어지고 다른 선거도 좀 떨어지는 동안에 모든 것이 제 잘못은 없고 전부 선배 정치인들, 또 전체 정치판의 잘못 때문에 떨어졌는가 싶어 마음속에 원망도 많고, 맺힌 생각도 참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면, 음... 저만 잘나고 정치만 잘못되고, 꼭 그리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가 안고 있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 우리가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여러가지 정치적 상황과 구도가 누구누구 탓할 것 없이, 국민들한테 모두 신용을 잃고 있는 정치적 구조 속에서, 저도 떄로는 좋은 기분도 느끼고, 떄론 어려움도 겪고 했던 것 같습니다. 흠,...

(중략)...그동안 저 혼자 무척 잘난 국회의원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었는데, 실제로 13대 국회 때나 떨어져 나가서 바깥에 있을 때나 일을 해보니까, 몇 가지 지식을 더 가지고 있다든지 몇 가지 논리적인 능력을 더 갖고 있다고 꼭 잘난 정치인은 아니라는 생각, 참 많이도 해봤습니다. 

또 동료 의원 여러분들, 모처럼 오랜만에 모난 성격의 정치인이 돌아왔지만 사랑해주시고 또 서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해서, 크게는 나라에 좀 보탬이 되면 좋겠고, 작게는 우리 정치인 모두가 국민들한테 존견받는 정치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posted by 벼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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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作 2017. 5. 6. 20:06

급속충전(級屬忠典)

대저 충성이라 함은 무엇인가를 속임 없이 정성을 들여 지키고 따름을 이른다. 그 따르고저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따르고저 하는지에 따라 그 가짓수는 여럿이다. 본래 서로에게 충성을 다하면 그 사이에 신뢰가 쌓이고, 그 신뢰는 사람들을 단단히 묶어 주므로 충성은  집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아교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묽은 아교를 쓰면 벽이 위태하고, 너무 진한 아교를 쓰면 주위에 달라붙어 해를 끼치듯, 너무 약하거나 강한 충성은 나라를 어렵게 한다. 내가 이제 급속충전을 씀은 충성의 등급과 속성을 잘 구별하여 잘못된 충성에 빠지는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먼저 겉으로는 어떤 가치를 따르고 지키는 듯 하되 형세가 바뀌면 뒤돌아서 제 살길을 도모하는 약한 충성이 있다. 이를 오직 자기 생존을 기하는 충성이라 하여 기생충(企生忠)이라 부른다. 이런 이들은 항상 상황이 달라졌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이를 자기 책임을 저버릴 핑곗거리로 삼는다. 일전에 박씨 성의 왕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며 진짜 보수를 내걸었던 선비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당파라 불렀다. 그런데 이들 중 13인의 선비는 자기 당파에서 새로운 왕이 나오지 않을 상황이 되자 먹고살 길을 찾아 자기 당파를 버리고 본래 박씨 왕의 당파였던 ()’당파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당파에서 이들을 받아주지 않자 한 선비가 다시 돌아가 12인이 되었는데, 이들 12인이 자기 자리 보전에 지장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하여 이들을 기생충 중에서도 특히 십이지장충(十二支障忠)이라 불렀다. 이는 책임과 신뢰를 저버려 정치를 어지럽게 하니, 곧 좋지 못한 충성이다.

한편 충성이 너무 강하여 자신이 따르는 가치나 사람에 반대하는 이들을 완전히 배척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오직 단 하나의 사람과 가치 이외에는 모두 배제하는 충성이라 하여 일배충(一俳忠)이라 이른다. 이러한 이들은 주로 편을 가르는 언동을 통해 자기 세를 불리는데, 그 수단은 종교나 지역, 성별, 세대, 정치성향 등으로 무궁무진하다. 이를테면 일전에 박씨 왕은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시인과 서예가들의 이름을 명부에 적고, 그들이 시 짓고 그림 그리는 일을 금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즐겁지 않은 명부라 하여 불락(不樂))명부라 불렀다. 이런 충성을 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결국 자신들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내쫓아 버려 나라 안에 인재가 없게 된다. 이를 나라를 텅 빈 갱도와 같게 하는 충이라 하여 충공갱(忠空坑)이라고도 한다. 그런 자들이 나라를 이끄는 것은 충격과 공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약하지 않되 너무 강하지도 않아 중용을 이루는 충성은 완충(完忠)이라 부른다. 배척되는 이 없이 여러 의견이 완전히 한 데 모여 토론하며, 그리하여 마음()이 가운데() 모여 뜻을 이룬다는 의미다. 이런 충성심을 가진 자들이 나라를 통치하는 때를 두고 사람들은 완충되었는가?’완충됐네처럼 말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권력을 잡아 충성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때로 충성의 강약을 조절해야 하므로, 항상 완충의 덕을 이루기란 어려운 일이다. 올바른 선비들은 이 피치못할 충성의 왜곡을 쉬쉬하여 넘기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족발을 먹는 행사를 열어 자신들의 충성에 대해 오랫동안 소통하였다. 이것이 오랫동안 충을 말하고 움직이면 큰 만족이 생긴다장충동 왕족발(長忠動 王足發)’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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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벼린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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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作 2017. 4. 18. 21:02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한 시인은 깃발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깃대에 묶인 깃발은 어디로 날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정확히 가리키며 몸부림친다. 그 펄럭임의 소리는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다. 차라리 고요에 가깝다.

 한 나라의 국기 또한 하나의 깃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향해 아우성치고 있을까. 500여년 전 프랑스와의 100년 전쟁을 갓 마친 영국에서는 두 가문 간에 왕권을 둔 전쟁이 벌어졌다.  흰 장미 문양을 쓰는 가문과 붉은 장미 문양의 가문이 벌인 이 전쟁은 장미 전쟁이라 불린다. 길었던 전쟁을 겨우 마치고 돌아온 백성들은 뒤이은 귀족들의 권력다툼에 다시 사병으로 동원되어 피를 흘렸다. 전장에 세워진 장미 문양 깃발 아래에서 그들은 때로는 농노로, 때로는 졸병으로 속박되었다. 깃발은 가문의 것이지, 백성들의 것이 아니었다.

깃발을 백성들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혁명이 필요했다. 바스티유를 함락한 다음 날, 투쟁에 참가한 이들은 파란색, 흰색, 붉은색 표지가 달린 모자를 받아들었다. 그 모자를 쓰고 그들은 오로지 그들 자신과 그들의 동료들을 위해 피를 흘렸다. 그들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선언했다. ‘자유롭고 평등모든 인간’. 자유, 평등, 박애를 의미한다는 그 세 가지 색을 가지고 그들은 왕가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깃발을 세웠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의 농노나, 졸병이 아니라는 그 선언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자유. 그러므로 국기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향해 아우성치고 있는 셈이다.

나의 국기에도 그런 아우성이 서려 있다. 19193월 시장에서,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던 이들이 갈구한 것은 망한 나라 조선의 복벽이 아니었다. 나라가 망한 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빼앗긴 그들의 매맞지 않을 자유, 토지를 가질 자유, 회사를 세울 자유를 위해 그들은 국기를 흔들었다. 19876월 넥타이를 매고, 유모차를 끌고 태극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국가에 의해 빼앗긴, 스스로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을 자유였다. 태극기 아래에서 국민들은 각자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다.

그리고 2016년과 2017년 사이의 겨울에도 우리의 국기가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렸다. 바람이 불면 꺼질 것으로 가정되었던 촛불과는 달리, 태극기는 바람과 함께 더욱 힘차게 펄럭거릴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태극기들이 국가가 아니라 자유를 향했던 것과는 달리, 지난 겨울의 태극기는 국민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아우성쳤다. 표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기업 경영의 자유, 그리고 국민이 스스로 뽑은 지도자로 하여금 국정을 운영하게 할 자유. 그들이 수많은 자유를 침해하고 의무를 위배한 국가를 향해 깃발을 흔들었을 때, 그들 손에 쥐어진 것은 국기인 태극기가 아니라 그저 태극 문양이 그려진 무언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국기인 태극기는 여전히 아우성치고 있다.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이 손에 든 촛불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그렇기에 그 권력은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문도 대통령이 침해한 국민의 자유를 열거함으로써, 국가가 지향해야 할 바가 국민의 자유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비록 자유가 아닌 국가를 위한 것이었을지라도, 태극기를 든 사람 손에서 그것을 들 자유를 뺴앗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인은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썼지만, 나는 깃발 끝에 슬픔보다는 희망을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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