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06
감상 - 강신주, 『김수영을 위하여』, 천년의 상상, 2012
신은 죽었다, 라고 니체는 말했다. 신의 죽음은 곧 틀의 붕괴다. 틀의 붕괴는 위기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던 우리의 앞에는 이제 우리가 가야 할 망망한 길 뿐이다. 그 길은 길잡이도 없이 혼자 가야 하는 불안의 길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다. 신이라는 틀은 안정적인 그 만큼 폭력적이다. 신의 품 안에서 우리는 누구나, 우리 스스로이기보다 그의 아들딸이다. 이 때 신의 죽음은 곧 틀의 극복이다. 우리는 이제 다른 어떤 의미도 덧씌워지지 않은, 오직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는, ‘나 자신’이 될 기회를 잡는다. 우리 스스로가 말미암아 틀이 되는, 자유의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자유로 가는 길에 따르는 우리의 불안은 다른 이름의 신들을 자초한다. 자본이라는, 혹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신들을 우리는 어떻게 다시 해체할 것이며,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며, 그럼으로써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김수영과 강신주의 인문정신은 자유로의 여정 위에 서 있다.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예술적인 삶을 살고 싶다. 이것은 모든 이미지화된 삶들에 대한 반대다. 한편으로는 아직 남아 있는, 내가 스스로 이름붙일 수 있는 삶에 대한 예의다.
예술이란 곧 자신을 세상에 내놓으려는 시도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일지라도 자신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상품이다. 그러므로 예술적인 삶이란 자신이 되려는 삶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이미지화된 삶에 대한 반대’ 정도의 표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치열한 싸움을 동반하는 삶이다. 김수영은 그의 시 <거미>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 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김수영은 서러웠다. 그러나 바라는 무언가가 있을 때 설움은 차라리 입을 맞추어도 좋을 것! 그는 바라는 것이 있었기에 싸웠다. 그의 싸움은 철저했다. 그는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갔다. 그는 온몸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과 싸웠고, 그 온몸으로 세상을 밀고 나갔다. 그의 시와 산문 내내, 김수영은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욕을 하’며 ‘절정 위에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와 싸웠다. 그리고 거제도 수용소에 반공포로로 붙잡혀 모든 자유가 부정당하던 때부터, 김수영은 ‘김일성만세’를 인정하는 것이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이라고 외치며 세상과도 싸웠다. 그는 시로, 글로 싸웠다. 그의 싸움의 결과는 단독성(singularity)-보편성(universality)이었다. 그는 자기 몸으로 부딪혀 일반성(generality)과 특수성(particularity)의 구도를 붕괴시켰다. 일반적인 것은 특수한 것을 포함한다. 특수한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그럴 때 사물과 사람은 교환가능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일반성의 틀을 들어냈을 때 실상 모든 개체는 스스로가 자기의 이름을 붙이는 단독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의 존재는 그 어떤 일상언어로도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 김수영은 시라는 언어를 통해 단독성을 추구했다. 그의 시는 하나하나가 단독적이었다. 그 시들에 쓰인 새로운 언어는 시인과 세계의 관계망을 붕괴시키고, 새롭게 건축했다. 시가 건축한 새로운 관계망은 새로운 행동, 새로운 삶의 공간이 된다. 김수영은 성실한 시란 ‘침묵의 한 걸음 앞에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상태, 더 이상 시가 필요 없는 상태, 새로운 삶을 김수영의 시는 이끌었다. 그러나 김수영의 단독성은 절대 단독적일 수 없다. 시인의 새로운 행동은 새로운 세계를 초래한다. 혹은 시인의 새로운 행동은 새로운 세계를 요청한다. 다시 말해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bring-call for)’. 김수영이 만드는 세계는 속세와의 단절 끝에 혼자의 구원만을 달성하는 세계가 아니다. 김수영의 구원은 곧 세계의 구원이다. 김수영의 구원은 세계의 구원을 부른다. 이 세계는 사물과 사람들이 각자의 단독성을 창조한 세계이다. 그런데 가장 단독적인 것은 곧 가장 보편적이다. 가장 김수영다운 삶이 바로 가장 인간다운 삶이다. 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소통을 한다. 단독적인 것들의 자유로운 공동체, 그것이 김수영이 시를 통해 추구했던 이상일 것이다. 이 글은 내가 이해한 김수영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처참하게 불완전하다. ‘내가 이해한’이라는 점에서는 자아로 가득 찼고, ‘김수영의 조각들’이라는 점에서는 텅 비었다. 그러니 이 글은 소통불가능하고 의미없다. 아마도 소통불가능하고 의미없다는 성찰만이 이 글을 소통가능하게, 의미있게 만들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김수영의 어깨 위에 두 개의 질문을 얹는다. 시를 수단으로 한 김수영의 인문정신은 우리 삶의 다른 영역으로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은 오히려, 예술적이기 위한 가장 쉬운 선택지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다른 영역 또한, 예술가가 아닌 다른 사람들 또한 예술적이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정치에서, 이를테면 경영에서 우리는 어떻게 예술적일 수 있을까? 모든 이들이 시인이 되는, 단독적인 것들의 자유로운 공동체를 위해서는 시는 무너져야 한다. 또한 단독성은 엄밀히 말해 단독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단독적인 것은 언제나 맥락 속에서만 단독적이고, 온전한 단독성은 그런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김수영이 추구한 단독성은 단독성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단독성에 닿을 수는 없을까? 이를테면 우리를 더욱 단독적으로 만들어 주는, 다시 말해 스스로 이름붙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또 다시 말해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게 해 주는 연애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것은 김수영이 결여했던 것이다. 김수영은 외로운 싸움을 했다. 연애한다고 해서 외롭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응원하는 사람, 위로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회복은 훨씬 빠르지 않을까. 오래 전부터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자 일을 하고 싶다고 할 때 이유는 항상 기자를 하면서 세상 구석구석을 보다 보면 나의 눈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른 직업들을 생각할 떄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상에 조금 더 확신을 갖는다. 여전히 수없이 많이 좌절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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