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作

태극기

벼린눈 2017. 4. 18. 21:02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한 시인은 깃발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깃대에 묶인 깃발은 어디로 날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정확히 가리키며 몸부림친다. 그 펄럭임의 소리는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다. 차라리 고요에 가깝다.

 한 나라의 국기 또한 하나의 깃발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향해 아우성치고 있을까. 500여년 전 프랑스와의 100년 전쟁을 갓 마친 영국에서는 두 가문 간에 왕권을 둔 전쟁이 벌어졌다.  흰 장미 문양을 쓰는 가문과 붉은 장미 문양의 가문이 벌인 이 전쟁은 장미 전쟁이라 불린다. 길었던 전쟁을 겨우 마치고 돌아온 백성들은 뒤이은 귀족들의 권력다툼에 다시 사병으로 동원되어 피를 흘렸다. 전장에 세워진 장미 문양 깃발 아래에서 그들은 때로는 농노로, 때로는 졸병으로 속박되었다. 깃발은 가문의 것이지, 백성들의 것이 아니었다.

깃발을 백성들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혁명이 필요했다. 바스티유를 함락한 다음 날, 투쟁에 참가한 이들은 파란색, 흰색, 붉은색 표지가 달린 모자를 받아들었다. 그 모자를 쓰고 그들은 오로지 그들 자신과 그들의 동료들을 위해 피를 흘렸다. 그들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선언했다. ‘자유롭고 평등모든 인간’. 자유, 평등, 박애를 의미한다는 그 세 가지 색을 가지고 그들은 왕가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깃발을 세웠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의 농노나, 졸병이 아니라는 그 선언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자유. 그러므로 국기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향해 아우성치고 있는 셈이다.

나의 국기에도 그런 아우성이 서려 있다. 19193월 시장에서,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던 이들이 갈구한 것은 망한 나라 조선의 복벽이 아니었다. 나라가 망한 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빼앗긴 그들의 매맞지 않을 자유, 토지를 가질 자유, 회사를 세울 자유를 위해 그들은 국기를 흔들었다. 19876월 넥타이를 매고, 유모차를 끌고 태극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국가에 의해 빼앗긴, 스스로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을 자유였다. 태극기 아래에서 국민들은 각자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다.

그리고 2016년과 2017년 사이의 겨울에도 우리의 국기가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렸다. 바람이 불면 꺼질 것으로 가정되었던 촛불과는 달리, 태극기는 바람과 함께 더욱 힘차게 펄럭거릴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태극기들이 국가가 아니라 자유를 향했던 것과는 달리, 지난 겨울의 태극기는 국민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아우성쳤다. 표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기업 경영의 자유, 그리고 국민이 스스로 뽑은 지도자로 하여금 국정을 운영하게 할 자유. 그들이 수많은 자유를 침해하고 의무를 위배한 국가를 향해 깃발을 흔들었을 때, 그들 손에 쥐어진 것은 국기인 태극기가 아니라 그저 태극 문양이 그려진 무언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국기인 태극기는 여전히 아우성치고 있다.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이 손에 든 촛불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그렇기에 그 권력은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문도 대통령이 침해한 국민의 자유를 열거함으로써, 국가가 지향해야 할 바가 국민의 자유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비록 자유가 아닌 국가를 위한 것이었을지라도, 태극기를 든 사람 손에서 그것을 들 자유를 뺴앗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인은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썼지만, 나는 깃발 끝에 슬픔보다는 희망을 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