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1일차
제주도 여행 1일차에 대한 글.
재작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큼의 설렘은 아니다. 계획 없는 나조차 여행 책을 사보고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바리바리 준비를 해 보았던 그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가고 싶은 곳 몇 군데가 대강 떠다닐 뿐 며칠 째에는 어디서 무엇을 만나야겠다 하는 생각이 없는 채로, 그저 첫 밤을 보내며 계획해봐야겠다는 안일함으로 공항에 내려서는 것이다.
그 안일함은 한편으로는 편안함이다. 저녁 비행기에서 내리면 삼성혈에서 고기국수를 한 그릇 먹고 탑동광장에서부터 용담해안도로를 파도와 바닷바람과 함께 걸어내려간 끝자락의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다는, 마치 옛 연인과 걸었던 길마냥 생생한 기억이 설렘은 조금 앗아갔을망정 지나치게 맘졸이는 여행은 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국수를 들이켜고 걸어올라온 탑동광장 해변에는 그날따라 파도가 심하게 철썩이고 있었다. 물보라가 방파제를 타고 넘어왔는지 저 먼발치에서부터 안경에 달라붙어 오는 물방울들이 느껴졌다. 나는 이 해안도로와 방파제를 보니 마치 옛 연인을 만나는 듯한 짠한 마음, 그리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이 든다. 그런 맘에 방파제에 가까이 다가가 동쪽으로 펼쳐진 현무암 해변을 보다가 서편으로 고개를 돌려 해안도로를 걸어볼까 하는 참에, 나의 옛 연인은 격한 환영인사를, 쌓였던 옛 정인지 억하심정인지를, 방파제를 훌쩍 넘어 내 온 몸을 후려치는 물보라의 귀싸대기로 풀어 놓았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뒤에서 족구를 하다 내가 물보라 맞는 광경을 보고 킥킥댔을 한 무리의 청년들이 민망하기도 해 얼른 걸음을 옮기려다, 이런 여행의 시작을 사진으로나마(물론 옷에 들러붙은 소금기로도 남을 테지만)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휴대폰을 꺼내 보니 전원이 나가 있고, 제대로 켜지지를 않는다. 파도를 피하려 몸을 돌리는 사이 물이 뒷주머니까지 때린 것이리라.
그렇게 바닷바람에 몸을 말리며 해안도로를 걸었다. 밤의 해안도로는 그러나저러나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이 해안도로의 또 다른 모습을, 이를테면 낮의 바다빛을, 여름의 햇살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아니면 한겨울 눈보라와 함께 몰아치는 파도를 알고 느끼고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내 연인의 모든 것을 알기에는 너무나 짧다. 1년, 아니면 2년이면 충분할까. 이곳의 주민들이, 그리고 여기에서 학교를 다닐 거라는 내 친구가 부러워지는 순간에, 그 어떤 장소가 아름다움만을 가지고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애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결혼 후에 보이듯, 사람이든 장소든 그 본래의 모습이란 아름다움이라든지 추함이라든지 하는 알량한 언어와 인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것이고, 결국은 말로 할 수 없는 그 자체이리라. 살다 보면 다 똑같다는, 상투적인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존재에 어떤 말을 덧씌우는 것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을 하든, 거주를 하든,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덧씌우지 않아야겠다, 최대한 덜 덧씌워야겠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