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評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벼린눈 2016. 12. 27. 14:34

2013.09.30


인용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역사가란 '역사와 투쟁하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가가 투쟁하는 역사란 대중의 과거사에 대한 집단기억을 말합니다. 대중의 집단기억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지만 특정 이해관계 집단이나 정치가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조작되어 대중에게 주입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최고수준의 집단기억이라 할 국가와 민족의 역사에서 후자의 경우를 자주 봅니다. 우리 한국인은 반만년 전부터 하나의 민족이라는, 오늘의 한국인이 공유하고 있는 민족의식이 그 좋은 예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 대해선 제 2장에서 쓴 그대로입니다. 역사가는 이러한 대중의 집단기억에 매몰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역사가는 대중의 집단기억이 정치적으로 기획되거나 조작되었을 수 있음을 사료에 기초하여 대중에 알리는 전문 직업인이지요. 역사가의 비판을 통해 대중은 그들의 과거사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갖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할 지혜를 과거사의 성찰에서 찾는 것이지요. 그러한 성찰의 화두를 대중에 던지는 직업능력의 소지자가 역사가입니다. 역사가의 고발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역사가는 자기의 발언이 객관적이거나 법칙적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사료를 보니 이렇게 저렇게 통념과 다르더라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선진사회라면 대중은 그러한 역사가의 발언을 경청하지요. 대중이 역사가의 발언을 무시하면 그 사회는 후진사회입니다. 일단은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직접 먼지 묻은 고문서를 뒤지면서 얻은 지식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다른 역사가의 다른 의견과 견주면서 어느 의견이 옳은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저는 대중과 역사가 사이에 이러한 민주적인 분업관계가 성립해 있는 사회야말로 진짜 선진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김일성 만세, 는 된다고 외치면서, 친일파 만세, 혹은 일제 만세, 는 안 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물론 거칠지만, 여기서 우리는 지나친 감정은 걷어내고 '역사가'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이 역사가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