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作

불타는 소설의 밤

벼린눈 2016. 12. 27. 15:04

2015.04.13

  양귀자의 소설을 읽은 밤, 중정에 내려가 담배를 피우며 흐르는 상념들에 몸을 맡기던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의 조합은 이랬다. '불타는 소설의 밤'. 어디에서 섞여 들어왔는지 모를 묘한, 또 조금은 유치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계단을 올라오는 내내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하고 만 이 어구를 나는 비판하고 싶어졌다. 소설의 밤, 까지야 소설을 읽고 감성에 젖은 밤이었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불타는, 이라니.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이번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않은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이 얼마나 재미 없는 운명의 장난인지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운명이 치는 장난의 주인공이 된 스스로를 가여워했다. 가여워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스스로를 가여워 할 기회를 찾았다는 것이다. 후자 쪽의 생각이 한 층위 아래의 것이었다. 그 외에는 스스로를 회피주의자라고 부른 그녀를 생각했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무언가 회피하는 구석이 있기는 해도 맞닥뜨린 것들을 잘 대면해서 관리할 수 있는 상처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 내 감정이라든지 정신은 '불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차가웠다. 그러므로 불타는 이라는 수식어는 적절치 않다는 결론이지만, 그런 분석적인 비판 이전에 나는 내 안의 무언가를 불태우고, 불사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혹은, 정말이지 우연히 머릿속에 퉁겨 들어온 그 단어에 이런 의미를 덧붙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 생활을 싫어한다고, 또는 회피주의자라고, 몇 차례 그녀는 스스로를 명명했다. 그녀가 우도의 해변도로를 걸으며, 정말? 진짜? 따위의 어구를 자주 쓰는 사람은 자아가 약한 사람이라는 연구가 있다는 말을 뒤에 붙이며, 너는 스스로를 좋아하냐는, 역설적이게도 스스로에 대해 알려 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 생각났다. 묘하게도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여주인공의 모습에 그녀를 덧씌웠다. 물론 그녀라면(혹은 98년도가 아닌 2015년이라면) '모든 생애를 건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이 결혼은 아니었겠지만, 그녀에게 나는 '나영규'도, '김장우'도 아닌 남자가 되고 싶었다.